시간을 봉인하는 작업..

寫眞은 내가 카메라로 하는 言語 이다.

마음에 담는 글 41

허물_정호승

느티나무 둥치에 매미 허물이 붙어 있다 바람이 불어도 꼼짝도 하지 않고 착 달라붙어 있다 나는 허물을 떼려고 손에 힘을 주었다 순간 죽어 있는 줄 알았던 허물이 갑자기 몸에 힘을 주었다 내가 힘을 주면 줄수록 허물의 발이 느티나무에 더 착 달라붙었다 허물은 허물을 벗어 날아간 어린 매미를 생각했던 게 분명하다 허물이 없으면 매미의 노래도 사라진다고 생각했던 게 분명하다 나는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허물의 힘에 놀라 슬며시 손을 떼고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를 보았다 팔순의 어머니가 무릎을 곧추세우고 걸레가 되어 마루를 닦는다 어머니는 나의 허물이다 어머니가 안간힘을 쓰며 아직 느티나무 둥치에 붙어있는 까닭은 아들이라는 매미 때문이다 허물 - 정호승

대나무의 고백

늘 푸르다는 것 하나로 내게서 대쪽같은 선비의 풍모를 읽고 가지만 내 몸 가득 칸칸이 들어찬 어둠 속에 터질 듯한 공허와 회의를 아는가 고백컨대 나는 참새 한 마리의 무게로도 휘청댄다 흰 눈 속에서도 하늘 찌르는 기개를 운운하지만 바람이라도 거세게 불라치면 허리뼈가 뻐개지도록 휜다 흔들린다 제 때에 이냥 베어져서 난세의 죽창이 되어 피 흘리거나 태평성대 향기로운 대피리가 되는, 정수리 깨치고 서늘하게 울려퍼지는 장군죽비 하다못해 세상의 종아리를 후려치는 회초리의 꿈마저 꿈마저 꾸지 않는 것은 아니나 흉흉하게 들려오는 세상의 바람소리에 어둠 속에서 먼저 떨었던 것이다 아아, 고백하건대 그 놈의 꿈들 때문에 서글픈 나는 생의 맨 끄트머리에나 있다고 하는 그 꽃을 위하여 시들지도 못하고 휘청, 흔들리며, 떨며..

단호한 것들

나무는 서 있는 한 모습으로 나의 눈을 푸르게 길들이고 물은 흐르는 한 천성으로 내 귀를 바다에까지 열어 놓는다 발에 밟히면서 잘 움직거리지 않는 돌들 간혹,천길 낭떠러지로 내 걸음을 막는다 부디 거스르지 마라, 하찮은 맹세에도 입술 베이는 풀의 결기는 있다 보지 않아도 아무 산 그 어디엔 원추리꽃 활짝 피어서 지금쯤 한 비바람 맞으며 단호하게 지고 있을 걸 서 있는 것들, 흔들리는 것들, 잘 움직거리지 않는 것들, 환하게 피고지는 것들 추호의 망설임도 한점 미련도 없이 제갈길 가는 것들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들 정병근-단호한 것들

한량없는 사랑

사랑이라면 짝사랑의 기억 밖에 없는 나는 일찌감치 사랑니를 네 개나 뺐다 믿어지지가 않았다 제대로 된 사랑 한번 못해 본 내게 그렇게도 많은 사랑이 뿌리내려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니 사랑이란 이름을 가진 것들은 아픔도 준다며 통증의 근원은 미리 제거해 두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의사는 나를 설득했다 아픔 없는 사랑은 꿈꿔 본 적도 없지만 비겁하게도 아직 싹도 나지 않은 사랑까지를 포기한 후 혀는 자꾸만 허전한 사랑의 흔적을 더듬었다 이제 내 몸에 사랑은 없구나 아파도 좋으니 물어 달라고 어여쁜 사랑이 온대도 그 사랑 물 수가 없겠구나 비어 있는 사랑 대신 살이 차오르고 더듬어도 더 이상 사랑의 흔적조차 없다 날 잊어선 안돼 가 아니라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시작해 보라는 한량없는 사랑의 ..

열쇠들-문창갑

아.이 열쇠들 사람을 정리하다 보니 짝 안 맞는 열쇠와 자물쇠들 수두룩하다 감출 것도, 지킬 것도 없으면서 이 많은 열쇠와 자물쇠들 언제 이렇게 긁어모았는지 아, 이 열쇠들 이 자물쇠들 알겠다, 이제야 알겠다 내 앞에 오래 서성이던 그 사람 이유 없이 등돌린 건 굳게 문 걸어 잠그고 있던 내 몸의 이 자물쇠들 때문이었다 알겠다, 이제야 알겠다 열려있던 그 집 그냥 들어가도 되는 그 집 발만 동동 구르다 영영 들어가지 못한 건 비틀며, 꽂아보며 열린 문 의심하던 내 마음의 이 열쇠들 때문이었다 -문창갑-

나의 가난은

오늘 아침은 다소 행복하다고 생각는 것은 한 잔 커피와 갑 속의 두둑한 담배, 해장을 하고도 버스값이 남았다는 것. 오늘 아침을 다소 서럽다고 생각는 것은 잔돈 몇 푼에 조금도 부족이 없어도 내일 아침 일도 걱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난은 내 직업이지만 비쳐 오는 이 햇빛에도 떳떳할 수가 있는 것은 이 햇빛에도 예금통장은 없을 테니까...... 나의 과거와 미래 사랑하는 내 아들딸들아, 내 무덤가 무성한 풀섶으로 때론 와서 괴로웠을 그런대로 산 인생 여기 잠들다, 라고, 씽씽 바람 불어라...... 천상병 - 나의 가난은

차 향내 사람 향내

향기나게 커피 잘 뽑기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녹차 잘 우려내기는 더 어렵다. 차 향내를 밝히면서도 사람 향내는 풍기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찻잎이 그렇듯이 사람도 자라면서 점점 타고난 향내를 잃어버리고 떫은 맛만 낸다. 향내까지 바라지는 않더라도 사람 냄새라도 풍기는 그런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다. - 강운구의《시간의 빛》중에서 -